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데이지 밀러

- 랜돌프?
- 네

- 뭐 하니?
- 그냥 있어요

- 어디 가려는 거야?
- 아뇨

인디언은 없나?

- 내려갈 때까지 얌전히 있어라
- 알았어요

- 안녕하세요?
- 그럼요

설탕 좀 먹어도 되요?

먹어도 되냐고 물었잖아요

설탕 말이냐?
그러렴

- 스위스 사람 아니네요
- 마술을 보여주마

- 독일 사람이에요?
- 손등에 설탕을 올렸지?

이제 네 손을 밑에 놓고
가만히 있거라

이 설탕이 내 손바닥을
통과하게 할 테니까

- 그럼 영국 사람이에요?
- 잘 봐라

폴란드 사람 아니에요?
난 미국 사람인데

- 나도 그렇단다
- 발음이 전혀 아닌데요?

- 유럽에서 살아 그런가 보구나
- 유럽에서요? 어쩌다가요?

- 그야 좋으니까
- 유럽이 좋다고요?

- 이빨 썩을라
- 어차피 없어요

- 혹시 치과 의사예요?
- 아니란다

- 보세요
- 세상에!

일곱 개밖에 안 남았어요
어제 엄마랑 세어봤거든요

또 빠지면 흠씬 패준다지만
나도 어쩔 방법이 없어요

지대가 높아서 빠지나 봐요
이 호텔 맘에 들어요?

- 여기 묵으세요?
- 숙모님을 뵈러 왔단다

- 그러다 이 상할라
- 사탕이나 찾아봐야겠어요

미국 사탕이 최고인데
맘에는 들어요?

- 누구 말이냐?
- 숙모님 말이에요

- 숙모님인데 당연하지
- 아닌 것 같은데요

랜돌프, 뿌렸다간 혼날 줄 알아

- 어때요?
- 저 여자 분을 아니?

저런 여자 몰라요

우리 누나예요

- 뭐 하는 거야?
- 알프스 산맥에 오르고 있어

벌써 내려온 거니?

- 미국 분이래
- 조용히 해

동생 분이랑 얘기 중이었어요

- 그건 이태리까지 못 가져가
- 가져갈 거야

- 안 가져가는 게 좋을걸
- 이태리요? 생플론도 가시나요?

- 글쎄요, 어느 산이었지?
- 뭐가?

이태리에서 여행가는 거 말야

- 난 미국에 가고 싶어
- 이태리도 멋진 곳이란다

- 사탕도 있어요?
- 됐어, 어머니 말씀 잊었어?

못 먹은 지 100주는 지났어!

경치가 좋죠?

저기 당 뒤미디까지 보이네요

- 아까 그 마술 보여줘요
- 유치한 거란다

- 좀 앉으시겠습니까?
- 서 있는 게 좋아요

- 미국 사람이래
- 정말이세요?

- 억양이 독일 분 같으신데요
- 그러게

미국인 같은 독일인은 봤어도
그 반대는 처음이로군요

- 저희는 뉴욕에서 왔어요
- 돌아가고 싶어

- 이름도 안 물어봤구나
- 랜돌프요, 누나 것도 말해요?

- 알고 싶구나
- 애칭은 데이지 밀러예요

- 넌 그런 거 없지?
- 본명은 애니 밀러고요

우리 아빤 에즈라 밀러인데
지금은 다른 세상에 계세요

- 저런!
- 스키넥터디에서 큰 사업을 하죠

저기 가서 나무나 탈래

유럽이 싫대요, 저도 싫대고요

저 앤 친구가 딱 하나 있는데
가정교사한테 벗어나질 못해요

- 동생 분은 가정교사가 없나요?
- 어머니가생각 중이세요

보스턴에서 온
샌더스 부인이 될 것 같아요

하지만 랜돌프는 가정교사와
여행하는 걸 싫어해요

기차 안에서
수업 받기 싫어하거든요

기차 안에서 페더스톤이라는
영국 아가씨를 만났어요

저더러 랜돌프를
가르쳐 보랬는데

- 오히려 쟤가 절 가르칠 걸요
- 총명해보이더군요

이태리에서도 가정교사를
구할 수 있을까요?

물론이죠, 이태리엔
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죠

- 혹시 대학에 다녀보셨어요?
- 제네바에서요

페더스톤 양이 미국에서
호텔에 묵어봤냐고 묻더군요

유럽에 오기 전까지는 호텔에
이렇게 자주 머문 적이 없어요

- 유럽은 호텔 천지에요
- 좀 많죠

- 아주 아름다운 곳인 것 같아요
- 다행이로군요

실망도 안 했어요
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

친구들이 많아서요

파리의 드레스를 입을 때면
유럽이 느껴져요

- 누구 기다리세요?
- 숙모님과 온천에 가려고요

파리 드레스들 때문에
유럽에 와보고 싶었어요

- 어디가 아프신데요?
- 예?

- 숙모님이요
- 의사 말이라면 다 믿으시죠

하지만 아직 사교모임을
못 즐겼어요, 혹시 아세요?

- 글쎄요...
- 통 사교모임을 볼 수가 없네요

- 치료 받으실 거예요?
- 그럴 일은 없어야죠

전 사교모임이 좋아요
언제나 즐겨왔죠

스키넥터디 뿐 아니라
뉴욕에서도 자주 그랬어요

작년 겨울엔 저녁 초대를
17번이나 받았죠

뉴욕에 남자 친구들이 많거든요
여자 친구도 많고요

- 남자들 모임에도 많이 갔어요
- 그렇군요

- 성에 가보셨어요?
- 쉬옹 말입니까?

- 뭐라고요?
- 쉬옹 성이요

- 가보셨어요?
- 그럼요, 그 쪽은요?

아뇨, 가보고 싶어요

그것도 못보고 떠나긴 싫은데

증기선을 타시면 될 텐데요

유지니오도 그러더군요
일정을 맡은 안내인이에요

성격은 엄청 까다롭지만
능력 하나는 대단해요

지난 주에 가보려고 했는데
어머니가 소화 불량이라서

- 어머니도 온천으로 모실까요?
- 글쎄요...

랜돌프는 성 같은 건 지루하대요

랜돌프를 혼자 두자니
유지니오가 맡길 싫어하고

하지만 못 가보면
후회할 것 같아요

랜돌프와 같이 있어줄
사람이 없을까요?

- 그래 주실래요?
- 전 쉬옹에 가고 싶은데요

- 저랑요?
- 어머님도 함께요

어머니는 안 가실 거예요
돌아다니는 걸 싫어하시거든요

그럼 랜돌프를 어머니께 맡기고
우리 둘이 가죠

- 둘이서요?
- 유지니오!

날 찾아 다닐 줄 알았어요

아가씨, 시내로 가실 시간입니다

- 멋진 시계를 발견했거든요
- 그렇군요

- 동생 분은 어디 계십니까?
- 가기 싫대요

- 전 고성에 다녀올게요
- 쉬옹 말입니까?

- 아가씨가 자청하신 겁니까?
- 얘기 좀 해줘요

- 같이 가시면 좋겠군요
- 미국인 맞아요?

그건 저희 숙모님한테
확인해보십시오

그래요, 나중에 가죠

- 유지니오가 깜짝 놀라잖아!
- 마차가 기다립니다

- 시내로 가자
- 난 안 가!

그것 좀 그만 타라니까!

그런 사람들은 흔하단다

난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
우유 줄까?

네, 무시하신다고요?

무시할 만하니까 그런 거지
설탕도 줄까?

아뇨, 아가씨가 미인이던데요

물론 예쁘기야 하지
하지만 천방지축이야

- 그건 그렇죠
- 미국인들이 원래 매력은 있지

- 옷 입는 것도 아주 완벽해
- 맞아요

뭐가 맞니?
어디서 그런 취향을 배운 건지

그래도 흉하진 않던데요

프레데릭, 그 처녀는 안내인과
정을 통했단 말이다

- 정을 통해요?
- 그럼 그게 뭐겠니?

비쩍 마른 그 엄마도 똑같아

안내인을 신사나 학자 대하듯
친구처럼 대하지 뭐냐?

진정한 매너를 갖춘 사람을
한번도 못 본 건지

신사처럼 대하더구나

그 처녀가 그러니까
엄마도 따라 하는 거겠지

정원에서도 노닥거리기나 하고

안내인은 면전에서
담배를 피워대고

글쎄요, 전 안내인도 아니고
저한텐 매력적인 아가씨던데요

너 혹시 그 처녀랑
얘기를 한 거냐?

- 정원에서 만났어요
- 세상에, 뭐라고 했니?

존경하는 나의 숙모님께
언젠가 소개 시켜주겠다고요

그래서 나더러 감사하란 소리냐?

- 제가 존경하는 거 아시잖아요
- 그 처녀는 어쩌고?

잔인하시긴
순진한 아가씨에요

-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?
- 그러니까 얘기하죠

- 그럼 입 밖에도 내지 마라
- 철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

아주 예쁜 아가씨에요
쉬옹 성에도 가기로 했는걸요

둘이 함께 가겠다고?

그런데도 그 처녀가
순진하다는 거냐?

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
그런 계획까지 세운 거니?

- 베베이엔 하루 있었으면서
- 한 30분 얘기했어요

역시 예상대로구나

- 뭐가요?
- 못 말리는 처녀야

직접 한 번 안 보실 거예요?

정말 너와 단 둘이서
성에 가겠다더냐?

그러던데요

그럼 그 처녀를 만나는 영광은
정중히 사양하마

늙은이가 아무리 둔하다고
충격도 안 받겠니?

뉴욕 아가씨들은
다 그렇지 않나요?

우리 손녀들은 그런 일 없다
누구도 그런 짓 안 해

- 숙모님 혹시...
- 혹시 뭐?

그 아가씨가 흑심을 품고
저한테 그랬단 말씀이세요?

프레데릭, 미국 아가씨들과는
어울리지 않는 것이 좋다

네가 말했듯이 그들은 철이 없어

네가 외국에서 오래 살아
착각할 순 있겠지

- 넌 너무 순진해
- 아뇨, 그렇게 순진하진 않아요

그럼 죄가 많던가

- 오셨군요, 찾고 있었는데
- 방금 식사를 마쳤어요

- 숙모님과요?
- 네

- 지루해서 못 견디겠어요
- 혼자 계셨나 보죠?

어머니랑 산책했어요

- 잠자리에 드셨나요?
- 아뇨, 쉽게 잠을 못 드세요

피곤해서 어떻게 사시는지
모르겠어요

랜돌프를 재우러 가셨어요
워낙 자는 걸 싫어하는 애라

- 쉽게 따라줘야 할 텐데요
- 잔소리도 싫어해요

아마 유지니오에게
시키셨을 거예요

하지만 유지니오도
랜돌프의 마음엔 못 들죠

- 숙모님은 어떠세요?
- 좋지 않으세요

가정부가 흰 소매만 입는
절도 있는 분이라더군요

이틀에 한 번씩은
꼭 두통을 앓으시고

- 관찰력이 뛰어나네요
- 재미있는 표현이죠?

- 특별하신 분인가 봐요
- 예, 그렇죠

저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

아무도 우리에게 말 걸지
않는 걸 보면 그렇긴 한가 봐요

- 숙모님을 뵙게 되어 기뻐요
- 하지만 숙모님의 두통이...

- 매일 아프시진 않겠죠
- 안 좋으시다네요

제가 싫으신가 보네요
솔직히 말씀하시죠

원래 친구가 없으세요
건강이 안 좋으셔서요

걱정 마세요
절 좋아하실 이유는 없죠

위엄 있고 특별한 분이니까

- 실은...
- 우리 어머니에요

- 랜돌프를 못 재우셨을 거예요
- 어머니가 확실해요?

모를 리가 없죠
항상 제 숄을 걸치시거든요

당신 숄을 두르신 걸
들키기 싫으신가 보네요

그건 괜찮다고 했어요
당신 때문에 못 오시는 거죠

- 그럼 가봐야겠네요
- 같이 가요

제가 함께 걷는 걸
싫어하실 텐데요

어머닌 제 남자 친구들은
다 싫어하세요

워낙 소심하셔서요
하지만 친구는 소개해야죠

-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?
- 이름을 알려드려야겠네요

프레데릭 포사이스 윈터본입니다

길어서 헷갈리네요

어머니
프레데릭 포사이스 윈터본 씨에요

- 뭐 하고 계셨어요?
- 글쎄다

- 이건 왜 입으셨어요?
- 예쁘잖니?

- 랜돌프는 재우셨어요?
- 웨이터랑 얘기하겠다더구나

- 윈터본 씨랑 얘기 중이었어요
- 아드님도 만났습니다

- 왜 그리 멋대로인지
- 도버에서보단 낫죠

밤새 잠도 안 자고
로비에 앉아 버텼거든요

- 포기했지
- 낮잠을 잤나 보죠?

- 아니에요
- 철 좀 들어야 하는데

- 대책이 없어
- 귀찮은 녀석이에요

데이지, 동생을
그렇게 말하면 안되지

- 사실이잖아요
- 겨우 열 살이야

성에도 안 간대요, 나야 좋지만

따님께서 제가 안내해드릴
영광을 주셨습니다

- 기차를 타고 가겠죠?
- 배도 좋고요

글쎄요
난 성에는 안 가봐서요

- 같이 가시죠
- 우린 그런 곳에 안 가봤어요

- 안타깝군요
- 저 앤 어디든 가려고 하죠

어떤 아가씨가 그러는데
여기선 성을 보지 말라더군요

- 어째서요?
- 곧 이태리로 가거든요

유명한 성들만 둘러볼 거예요

- 영국에서도 몇 군데 봤고
- 쉬옹도 구경할 만한데요

저 애가 가고 싶다면 할 수 없죠
누가 저 앨 막겠어요?

정말 안 가시겠습니까?

- 혼자 가세요
- 윈터본 씨?

- 배 좀 태워 주실래요?
- 얘야!

- 보내주시죠
- 저 애도 내키지 않을 거예요

윈터본 씨가
절 데려가고 싶어하세요

쉬옹까지 노를 저어드리죠

절 30분이나 혼자 두셨어요

어머님과 대화 중이었거든요

- 배에 데려다 주세요
- 그럼 저야 영광이죠

- 정중한 말투 맘에 드네요
- 정중한 제의니까요

- 제가 유도한 거잖아요
- 절 놀리시는군요

- 그렇지 않아요
- 그럼 아가씨가 노를 저으시죠

- 말투가 듣기 좋네요
- 직접 해보시면 좋을 겁니다

당장 해보고 싶어요
여기서 지체하지 말죠?

- 그래도 시간이 몇 시인데
- 11시입니다

- 배 좀 타고 올게요
- 이 시간에요?

- 윈터본 씨와 함께 가요
- 안 된다고 해요

안 가시는 게 좋겠는데요, 아가씨

유지니오는 뭐든
안 된다고만 하죠

아가씨를 모시는 게 일이니까요

- 혼자 가시는 겁니까?
- 이 분도 함께요

제 말이 그 말입니다
숙녀답게 행동하셔야죠

- 소란 피우셔도 상관없어요
- 바라는 바인걸요

- 저도 흥분돼요
- 랜돌프 군이 잠들었습니다

그럼 들어가봐야겠네요

- 실망이 크시죠?
- 좀 당황스럽네요

뜬눈으로 밤새진 마세요

빵!

- 거기서 뭐 하니?
- 그냥요

- 오래 있었니?
- 꽤요

- 안 내려올래?
- 싫은데요

- 그럼 잘 자렴
- 그래요

놓치진 않겠어요!
빨리 오세요!

빨리요, 잠깐만요!

봐요! 안 놓칠 거라고 했죠?

"옥석 위의 거대한 탑이로구나"

- 빅토르 휴고예요
- 마차보다 훨씬 재미있어요

증기선을 참 좋아하거든요

산들바람이 불고
사람도 많으니까요

너무 엄숙하시네요
장례식에라도 가는 것처럼

- 입이 귀에 걸렸는걸요
- 얼굴이 아주 작으신가 보네요

- 갑판에서 춤이라도 출까요?
- 모자는 제가 받아드리죠

- 이렇게 기쁜 순간은 없었어요
- 그러시다니 다행이군요

- 재미있으세요
- 제가요?

가요, 제일 먼저 내려야죠

9세대 경에 지어진 성입니다

11세대부터 13세대까지
더욱 크게 확장 건축됐죠

- 세기겠죠
- 세대요

- 세기요
- 그래요, 세대

- 저 위는 뭐죠?
- 잠시만요

성이라면 잘 아시겠죠?

모든 성이 같은 시대에
건축된 것은 아니죠

9세대부터 13세대에
지어졌다던데요

- 세기죠
- 그래요, 세대

많은 이들이 여기 갇혔었죠
보니바드도요

- 오래 있었나요?
- 4년 동안이요

- 당신도 여기 그만큼 계셨나요?
- 그보단 길죠

제네바에서 학교를 다니고
대학까지 나왔으니까요

이 구덩이는 뭐죠?

오블리에트 지하 감옥이에요
망각이란 뜻이죠

사람을 가둬놓고는
키를 내다버렸어요

- 형제자매 있으세요?
- 아뇨

오블리에트...

- 아름다운 탑이네요!
- 머리 조심해요

- 이 구멍들은 뭐죠?
- 글쎄요, 저도...

이 성은 알프스 통과로를
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요

왜 미국이 싫으세요?
그러신 것 같던데

- 아뇨, 좋아하는 걸요
- 오블리에트란 이름이 우습네요

- 여기 좀 봐요!
- 조심해요!

- 괜찮아요
- 낡아서 나무가 썩었을 거예요

정말 그러네요

- 왜 그렇게 빨리 걸어요?
- 그러게 말이에요

- 여긴 뭐죠?
- 뭐가요? 머리 조심해요

- 아름답네요, 안녕하세요?
- 안녕?

- 저기엔 뭐가 있죠?
- 같이 가요

- 계단 조심해요
- 빨리 오세요

밀러 양!

아멘!

- 혼자 그러다간 떨어져요
- 오블리에트 감옥으로요?

세상에!

저 5번째 기둥에
보니바드가 묶여있었어요

저런!

바이론 경이 그의 이름을 새기고
그 위에 시를 적었죠

- 어쩌다 그랬죠?
- 바이론이요?

- 보니바드요
- 종교개혁 때였어요

사보이 왕가로부터
제네바를 해방시키려다가

습격을 당해 이곳에 갇혀버렸죠

하지만 사보이 공작이 4년 후
성에 쳐들어와 그를 풀어줬어요

"쉬옹의 낡은 지하감옥에는
7개의 고딕 기둥이 있다'

"7의 회색 기둥은..."

"갈 곳을 잃어 이곳에 갇힌
어리석을 햇살들로..."

"눈부시다"

당신처럼
똑똑한 분은 처음이에요

- 또 놀리시는군요
- 아름다운 시인걸요

저희와 함께 여행하면서
좀 가르쳐주시죠

- 그러면야 좋죠
- 랜돌프의 교사가 되어주세요

그러고 싶지만 불행히도
제겐 다른 할 일이 있어서요

거짓말 마세요
사업가도 아니시잖아요

정해진 일정이 있어서
내일쯤 제네바로 돌아가야 해요

- 거짓말 말아요, 춥네요
- 같이 가요

여기 이 난로 디자인 봤어요?

제네바로 가는 게 아니죠?

아뇨, 내일까지 꼭 가야 해요

당신은 형편없는 사람이로군요!

그렇게 말하지 말아요

나 혼자 돌아가겠어요

- 아직 구경할 게 많은데요
- 불쾌해요, 잔인하시군요!

누구죠? 아름다운 아가씨가
제네바에서 기다리나 보죠?

그건 오해예요

오해라고요? 그 여자는
이틀간의 여유도 못 준대요?

- 아직 학업이 남아서 그래요
- 휴가도 안 주나 보죠?

놀리지 말아요

하루라도 지체했다간
당장 찾아오겠군요

내 눈으로 확인하게
금요일까지 가지 말아요

그만 해요, 즐거웠잖아요

밀러 양?

- 내가 놀리는 것 같나요?
- 아닌가요?

좋아요, 그만하죠
대신 로마로 절 찾아오세요

안 그래도 숙모님 별장이 있어서
한번 오라고 하시던 차였어요

숙모님이 아니라
날 보러 오는 거예요

좋습니다
무슨 일이 있어도 가죠

- 돌아갈까요?
- 배 타기 싫어요

그럼 마차로 가죠

그 추잡한 처녀가 부유한
사냥꾼들을 홀리고 다니더구나

창문 좀 닫아라
머리가 아파오는구나

이태리인들 음악은
왜 저리 고상한 맛이 없는지

- 계속 얘기해주세요
- 뭘 말이냐?

- 사냥꾼들이랑 밀러 양 얘기요
- 그렇지

그 졸부 사냥꾼들은
아주 저질이란다

그런 인간들과 어울리면서
얼마나 말들이 많은 줄 아니?

몇 명은 집에까지
데려갔다는구나

그러다 파티에 참석할 때는

꼭 어떤 이태리 청년을
데려오는데

매너가 깍듯한데다가
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

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

다른 사람한테 알아보도록 해라

- 밀러 양 어머님은요?
- 나도 모른다

그 사람들 얘기는 아는 게 없어

- 조카들은 잘 있나요?
- 물론이지

알렉산더는 42번 가에서
다른 동네로 이사했고

앤소니는 여전히
리버사이드 가에 살지

- 앤드류는 안 찾아오나요?
- 함부르크에 있다고 들었다

온 도시를 바삐 여행한다는데
내가 사는 곳만 안 오더구나

워커 부인 티타임에
가실 건가요?

차 마실 기운도 없다
워커 부인 맞춰줄 힘도 없고

- 전 이만 가볼게요
- 그러렴

그 추잡한 무리들과는
마주치지도 말아라

지금 당장 가서
만나보지는 않겠지만

베베이에서 만난 일이 있으니
방문해보려고 하는데요

내 말을 듣고도 만나고 싶다면
마음대로 하렴

다양한 인간을 경험하는 것도
남자의 특권이지

순진해서 그렇지
나쁜 사람들은 아닐 거예요

천박함이 악행인지 아닌지는
순정파 철학자들의 고민이다

그들은 아주 부도덕해

- 저 초상화는 누구 주시게요?
- 내 말 똑똑히 기억해라

초상화는 복사본과 증정할 거다
굉장히 값비싼 것이지

가격협상 따윈 절대 못 해
도둑맞는 게 낫지

로마인들은 쾌락과 죄악을
어떻게 구분하는지 아니?

맘껏 즐기면 쾌락이고
그걸 자백하면 죄악이지

그건 로마인들만의 특성이
아닌 것 같은데요

- 제네바는 좋았니?
- 예, 쭉 여기 계셨나요?

우리 애들은 거기 있어
네가 돌봐주기 바랬는데

- 학업이 워낙 바빠서요
- 올가는 만났니?

가끔요

- 결혼을 못해서 안 됐어
- 그런가요?

사연이 몇 가지 있지

- 존슨 부부 오셨습니다
- 가서 손님을 맞아야겠구나

조금 있다가 계속 얘기하자

안녕하세요, 존슨 씨
와주셔서 정말 기쁘네요

- 밀러 부인이십니다
- 싱클레어와 인사하세요

- 안녕하세요, 밀러 양?
-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!

나야말로 반가운걸요
어머니도 오셨군요

- 저 아저씨 알아!
- 구면이구나!

- 잘 지냈니, 랜돌프?
- 정말 오셨군요!

- 약속했으니까요
- 안 믿었어요

- 왜 진작 만나러 안 오셨죠?
- 오늘 도착했어요

- 거짓말 말아요
- 어머님이 해명해주시죠

로마에서 이보다
아름다운 집은 못 봤어요!

안 가본 집이 없을 테니
잘 아시겠죠

우리 집이 더 커
벽에 금도 더 많고

- 랜돌프, 조용히 해야지
- 내가 전에 말했었죠?

- 건강하셨는지요?
- 별로요

소화불량이래요, 나도 걸렸어요

아빠도 그랬는데 난 더 심해요

- 당분을 줄여야지
- 간이 나빠요

기후가 스키넥터디보다
상쾌하지가 못해서요

데이비스 선생님 같은 의사는
다신 못 찾을 거예요

할 일이 많은데도 날 위해서
온갖 종류의 치료를 해주셨죠

내 소화불량을 고치기 위해
안 해본 치료가 없었어요

우리가 떠나기 직전에도
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셨죠

애 아빠는 데이지가
유럽을 여행하길 바랬는데

내가 데이비스 선생님 없이는
오래 못 다닐 것 같더라구요

스키넥터디 최고의 선생님이죠
내 수면장애도 고치셨어요

- 로마도 즐거우실 텐데요
- 실은 좀 실망했어요

들은 게 너무 많아서
너무 색다른 걸 기대했나 봐요

그래도 점점 좋아지실 겁니다

- 난 점점 싫어지던데
- 꼬마 악동이구나

- 꼬마라니 말 조심해요!
- 네가 그렇지

- 로마 외에도 다닌 곳은 많아요
- 어딜 가보셨죠?

취리히요, 별 얘기도 못 듣고
갔던 곳이라 더욱 좋았어요

제일 좋은 곳은 리치몬드 시예요

리치몬드로 배를 타고 갔는데
즐거운 시간을 보냈거든요

하지만 배가
딴 길로 새서 문제였죠

그러다가 원래 길로
되돌아가는 거지

- 데이지 양은 즐거운가 본데요
- 맞아요

화려한 사교모임 때문이죠

- 친구도 아주 많이 사귀었어요
- 그렇다더군요

나보다 더 바쁜 애예요
안 끼는 데가 없고

멋진 청년들도 많이 안답니다
저 앤 로마를 아주 좋아해요

- 정말 심술궂은 분이군요
- 심술이라뇨?

베베이에서 내가 부탁했는데도
바로 제네바로 가버렸잖아요

당신의 듣기 좋은 투정을 듣고자
로마까지 왔잖습니까?

변명 말아요
재미난 얘기 들은 거 없으세요?

- 재미난 얘기라?
- 그럼 제가 해드리죠...

그만 가요
유지니오가 벼르고 있을 거예요

- 저도 파티에 참석할게요
- 반가운 얘기네요

대신 부탁이 있어요
친구를 데려올게요

- 나도 만나보고 싶네요
- 내 친구가 아니에요

- 제 친구예요, 지오바넬리죠
- 나도 만나보고 싶어요

이 세상 최고의 미남이랍니다
물론 윈터본 씨는 빼고요

미국 친구를 사귀고 싶은가 봐요

-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!
- 어떤 분인지 기대되네요

엄마, 유지니오가
벼르고 있을 거라니까요

- 호텔로 돌아가야겠어요
- 전 바람 좀 쏘이고 갈게요

- 지오바넬리랑 갈 거래요
- 핀치오에 다녀올게요

- 혼자서는 위험할 텐데요
-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

- 그러니까 위험하다는 거죠
- 그래, 열병 걸리면 어쩌려고

- 약 주면 되잖아요
- 워커 부인, 걱정 마세요

- 친구를 만나는 것 뿐인데요
- 지오바넬리 말이지?

- 지오바넬리라고요?
- 네, 멋진 청년이죠

데이지 양, 이 시간에 남자와
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아요

- 초급 실력의 영어는 해요
- 엉망이지요

건강과 성격을 해치는 일은
알아서 자제해요

윈터본 씨가 진정한 신사라면
그곳까지 절 데려다 주시겠죠

- 그럴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
- 정말 자상한 분이시군요!

산책하고 갈 테니 먼저 가요

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
센트럴 파크보다도 멋져요

왜 절 만나러 안 오셨죠?

- 기차에서 방금 내렸어요
- 참 늦게도 내리셨나 보군요

- 워커 부인은 방문하셨잖아요
- 그야 부인은...

제네바에서부터
아는 사이라 이거죠?

나와는 베베이에서부터
아는 사이니 찾아왔어야죠

그 동안 친구를
많이 사귀었다고 들어서요

로마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
방을 잡았어요

열병으로 죽지만 않는다면
겨울 내내 머물 곳이죠

원래는 조용하고
초라할 줄 알았어요

그림 설명이나 하는
늙은이들에게 둘러싸여

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
그건 일주일 뿐이었어요

지금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죠
사교모임도 독특해요

영국, 독일, 이태리식 중에서
영국식이 제일 나은 것 같아요

아주 친절하거든요
매일마다 이벤트도 있고

춤추는 일은 많지 않지만
춤이 전부는 아니니까요

전 대화도 좋아하거든요

워커 부인의 거실은 사교모임을
즐기기엔 너무 작더라구요!

저도 주세요

랜돌프에게 줄 사탕을
좀 살까요?

- 그러죠
- 얼마죠?

- 이거로 해요
- 2리라 입니다

- 여기 있소
- 감사합니다

- 데려다 드리죠
- 지오바넬리를 만나야 해요

- 꼭 그래야 해요?
- 기다릴 거예요

- 그 사람을 찾아주긴 싫은데요
- 그럼 혼자 찾죠

보내주지 않을 겁니다

길을 잃을까 두려우신가요?
사탕도 있잖아요

- 데이지 양...
- 저기 있네요, 나무 옆에요

- 저렇게 쿨한 사람 봤나요?
- 그 말 진심입니까?

- 농담따윈 하지 않아요
-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

- 지나치시군요
- 내 감정을 표현한 겁니다

난 명령하는 남자는 용납 못해요

제대로 된 사람의 말이라면
진지하게 들어야죠

그럼 지오바넬리가 바로
그 사람이라고 말해주세요

밀러, 여기요!

저 사람은 아니에요!

옷차림이 눈부신 걸 보니
종일 옷만 고르셨나 봐요

- 정말 친절한 아저씨군요
- 아가씨죠

- 미국인이십니까?
- 그렇소

- 미국에서 산 적은 없대요
- 싫으시던가요?

아뇨, 제네바에서
학업에 정진했죠

- 전 미국이 좋습니다
- 가보셨나요?

- 예?
- 미국에요

- 아뇨, 맞나?
- 맞아요

언젠가는 갈 겁니다
이태리인들은 싫거든요

- 전 좋아요
- 정말 전철하시군요

- 친절
- 고마워요

- 천만에요
- 윈터본 씨!

윈터본 씨입니까? 워커 부인께서
하실 말씀이 있다는데요

- 실례하죠
- 여자가 줄을 잇는군요

부인, 어쩐 일이신가요?

처녀가 저러고 있어서는 안되지

사람들이 사방에서 지켜볼 텐데
두 남자와 함께 걷다니

- 그리 문제될 것도 아닌데요
- 저 아가씨 앞날이 문제지

- 순진해서 그렇죠
- 정신 나갔어

이미 도를 지나쳤다고

백치처럼 구는 꼴이
지 엄마랑 똑같잖니?

딸을 저렇게 내버려두다니...

눈에 밟혀서 도저히
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

그래서 어쩔 생각이세요?

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처럼
마차를 타고 가자고 해라

그럼 사람들도 흉보지 않겠지
이쪽으로 오라고 해

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
얘기는 전해드리죠

안녕하세요, 지오바넬리 씨를
소개해드릴 수 있어 기쁘네요

이쪽은 워커 부인이세요
파티에 초대해주신 분이죠

- 영광입니다
- 정말 아름다운 마차 담요네요

올라타서 걸쳐보도록 해요

아뇨, 부인의 마차행렬을
지켜보는 게 재미있겠어요

그럼 함께 하도록 하죠

- 전 이분들과 함께가 좋은데요
- 이곳 격식은 그렇지 않아요

- 걷는 것이 건강에 좋은걸요
- 그럼 어머니와 걸어요

어머니는 열 발자국 이상
걷는 적이 없으세요

전 어린애도 아니고요

어린애도 아닌 사람이
남들 얘기는 신경도 안 쓰는군요

- 무슨 말씀이시죠?
- 마차에 타면 알려드리죠

그리 알고 싶지 않네요

버릇없는 처녀로 여겨지는 게
더 좋다는 말인가요?

당황스럽군요

윈터본 씨는 제가 마차에
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?

그게 좋겠군요

고리타분한 말씀이시네요

그럼 버릇없는 여자가 되겠어요
포기하시죠

조심해서 안녕히 가세요!

- 타거라
- 저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

당장 올라타지 않으면
인연을 끊을 줄 알아라

그럼 기다려주세요

- 저기 오시네요
- 부인과 함께 가봐야겠어요

미안하지만...

- 신중치 못한 행동이셨어요
- 난 솔직했던 것뿐이다

밀러 양이 난처해 했어요

자기 체면만 깎이는 거란 걸
얼른 깨달아야지

- 순진해서 그런 거죠
-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

- 뭘 어쨌는데요?
- 하는 짓마다 돌출행동이야

정체도 모르는
이태리 남자들과 헤죽거리고

한 남자와 저녁 내내
춤을 추질 않나

늦은 밤에도 전화통에 불이 나고
지 엄마는 뒷전이야

- 동생도 2시까지 안 자던데요
- 누나가 그 모양이니 그렇지

호텔로 남자가 찾아올 때마다
종업원까지 키득거린단 말이다

종업원들까지 신경 쓸 건 없죠

지오바넬리 같은 허풍선이를
신사라고 여기는 건 문제지만

- 그러게 말이다
- 삼류 예술가던데

- 하지만 어떻게 알겠어요?
- 그게 천하다는 증거다

- 얼마나 알고 지낸 거냐?
- 이틀이요

네가 제네바로 간다고
별별 말을 다 했지?

밀러 양의 가족들은
취향이 좀 특이하더군요

하지만 말이죠...

부인과 제가 제네바에
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죠

- 그만 하거라
- 뭘요?

그 처녀 편이나 들면서
놀아나지 말란 말이다

너한테도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
혼자 내버려둬

제겐 무엇보다도
즐거운 일인걸요

- 맘에 드는 아가씨에요
- 괜한 소문 만들지 말거라

제가 보기엔
이상할 게 전혀 없는데요

어쨌든 내 뜻은 전했으니
그래도 어울리고 싶거든

- 맘대로 하거라
- 전 이만 내리죠

맘대로 하렴

- 밀러 부인이십니다
- 오셨군

- 실례하겠네
- 나도 가봐야지

혼자 왔답니다

이태리에서 혼자 파티에 온 건
오늘이 처음이네요

랜돌프를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
데이지가 저 혼자 떠밀었어요

- 댁의 따님은...
- 혼자 다니는 건 익숙치 않아서

- 일행이 있다지 않았나요?
- 저녁식사 전에 단장을 했는데

같이 오기로 한 신사분이
도착해서요

지오바넬리 씨 말이군요
저도 잘 알죠

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더니
멈출 줄을 몰라서요

노래를 어찌나 잘 하시던지

잠시 후면 아마 도착할 거예요

그런 식으로 온다니 유감이군요

이런 식으로 내게 복수하다니!
상종도 하지 않겠어

얼마나 예쁘게 단장했는데
어쩌자고 꿈쩍도 않는지

밀러 양이십니다

제가 안 올 줄 아셨다면서요?
부인을 위해 준비한 꽃이에요

지오바넬리 씨는 노래솜씨가
일품이랍니다, 부탁해보세요

- 인사나 나누시죠
- 안녕하세요?

- 늦어서 죄송합니다
- 멋진 노래를 많이 준비했어요

저와 연습했거든요
제가 아는 분들도 오셨나요?

아가씨를 모를 사람은 없겠죠

- 뭐 좀 먹죠?
- 그래요, 어머니!

- 랜돌프는 재웠니?
- 노랫소리때문에 못 자던데요

저 노래가 마지막이면 좋겠구나
대체 누가 노래를 시킨 건지

- 데이지 밀러죠
- 재잘대기도 바쁠 텐데

고리타분한 대학생에게
또 접근하시는군

- 춤추기엔 거실이 작아서...
- 전 춤은 못 춥니다

마차 안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
다리가 굳는 게 당연하죠

안 그래도 안절부절못했답니다

- 당신 곁을 걷고 싶어서요
- 전 짝을 찾았어요

다리 간수를 잘하는 친구가
제 곁을 끝까지 지켜줬거든요

워커 부인이 절더러
마차에 올라타라고 한 건

예의를 생각해서겠지만

사람 생각은 모두 다르잖아요?
몇 일이나 그 얘기를 했어요

지오바넬리도 이태리 아가씨에겐
길을 걷자고 못했을 겁니다

그럼 어디를 걸으란 거예요?
핀치오는 공원이라구요

이태리 아가씨들은
꽤나 소심한 모양이네요

내 방식을 바꾸고 싶진 않아요

- 연애를 무척 즐기는군요
- 그럼요, 좋아하죠

정숙한 여자가 아니라고
말하려는 거죠?

- 정숙한 여자이긴 하지만...
- 뭐가요?

- 연애는 나와 하도록 해요
- 고마운 말씀이시군요

하지만 당신과는 싫어요
고리타분하거든요

- 또 그렇게 말하는군요
- 기분 나쁘신가 보죠?

- 난 화나면 고리타분해져요
- 보고 싶은데요

저 친구와의 연애는 그만 둬요
사람들이 숙덕거린다고요

- 그런가요?
- 젊은 처녀는 그러면 안되죠

그럼 늙은 유부녀는
그래도 되는 건가요?

연애는 미국식 관습이지
여기선 통하지 않아요

어머니와 동행하지 않고
지오바넬리와 걸으면...

불쌍한 어머니

저 사람과의 연애는 안 돼요
흑심 뿐이라고요

누구처럼 설교하진 않아요
게다가 당신은 좋은 친구인걸요

- 은밀한 친구죠
- 그렇군요

사랑이 아니라면
불륜 관계란 말이군요

지오바넬리 씨는 당신처럼
불쾌한 말은 하지 않아요

저쪽 방에 가서 차나 들까요?

이렇게 청해보신 적 있으세요?

- 좋은 충고를 드렸는데요
- 그것보단 차가 좋아요

노래 잘했어요, 멋진 노래였어요

안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
선생님이 뭘 하시든 괜찮아요

로마는 스키넥터디보다
기후가 상쾌하지 못해요

특히 겨울에는요
스키넥터디는 우리 고향이죠

데이비스 선생님 같은 의사는
어디에도 없을 거예요

스키넥터디를 생각하면
선생님이 떠올라요

절 위해 온갖 치료를
동원하셨거든요

- 저녁 내내 꼼짝도 않는군
- 그런가요?

- 가서 좀 끼어 들지?
- 천한 것 같으니

워커 부인, 음식을 어쩜
그리 맛있게 준비하셨어요?

저야 와주셔서 기쁘죠

오랜만에 봬서 기뻤어요

어머니가 피곤하실 거예요

여기 계셨군요
어머니, 피곤하시죠?

- 실례할게요
- 살펴 가세요

안녕히 계세요

- 아름다운 파티였어요
- 안녕히 가세요

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...

즐거운 시간이었어요

데이지가 저 없이
파티에 오긴 했지만

집에 갈 땐 그래도
함께 가는 게 좋겠네요

- 안녕히 계십시오
- 잘 가요

잔인하시군요

다시는 초대할 일 없을 거다

요즘 멍한 이유를 알겠구나

- 제가 그랬나요?
- 딴 생각 뿐이잖니?

- 날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면서
-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요

- 정신이 딴 데 가있구나
- 모르겠어요

- 저 처녀 이름이 뭐였지?
- 밀러 양이요

- 그 옆이 바로 밀회 상대지?
- 밀회라고 누가 그러던가요?

- 부도덕한 관계잖니?
- 그런 일은 전혀 없어요

듣기로는 저 처자가
사내에게 넋을 잃었다던데

사이가 좋은 것 뿐이에요

- 잘생긴 청년이구나
- 그래요?

척 보면 알잖니? 저 사내를
신사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

안내인보다야 낫지, 저 사내도
안내인이 소개 시켜줬을 거다

결혼에 성공하면 저 사내가
사례금을 지급하기로 했겠지

- 저 아가씬 결혼생각 없던데요
- 생각할 줄은 안다니?

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

매일 저렇게
허송세월이나 보내고

세상 고달픈 줄은 모르지

어쩜 저리도 천박한지

그건 지오바넬리만의 생각이에요
로마인들이 그렇죠

곧 네게도 약혼했다고
얘기를 전할 거다

믿어보렴

남자도 흉한 사람은 아니던데요
변호사니까요

최고 그룹에 끼진 못하지만

데이지 양이 관심은 보여도
결혼까지는 무리일 거예요

남자가 귀족 출신도 아닌 이상
불가능한 얘기죠

- 백작이라면 몰라도...
- 누구든지 상관없겠지

너무도 순진한 나머지
타인에게 비치는

자신들의 이미지를
모르는 건 아닐까요?

순진한 게 자랑은 아니지

- 윈터본 씨 아니세요?
- 오랜만이요!

- 방해가 됐나요?
- 전혀요

지오바넬리 씨께 미국노래를
가르치던 참이었어요

이리 와서 한 번 들어보세요

- 한 곡 불러주세요
- 아니, 무리에요

- 아니죠, 어서 앉으세요
- 랜돌프는 나갔나요?

유지니오와 함께
신발을 사러 갔어요

신발이 전부 떨어졌거든요
윈터본 씨, 앉으시라니까요

- 어서 시작하세요
- 데이지 양이 불러봐요

이건 너무 어려운 노래예요

어서 불러보세요
윈터본 씨도 기다리고 계시잖아요

- 데이지 양의 노래를 청해봐요
- 듣고 싶군요

그러세요?
지오바넬리 씨가 먼저 불러주시면

- 저도 한 곡 뽑죠
- 못 당한다니까

- 그렇겠죠
- 그럼 시작하죠

브라보!
앵콜!

신사분은 아닌 것 같은데
이제 당신이 불러봐요

- 듣고 싶으세요?
- 물론이죠

- 어머니!
- 안녕하십니까?

- 혹시 랜돌프 왔니?
- 같이 가셨잖아요?

가게에서 뛰쳐나갔지 뭐니?
유지니오가 찾고 있단다

집으로 온 줄 알았는데
내가 제 명에 못 죽지

제가 도와드릴까요?
이리 주시죠

- 워낙 많아서
- 정말 친절한 분이죠?

- 실례하죠
- 지오바넬리가 노래를 한대요

지오바넬리 씨만 고생이라니까요
어떻게 참는지, 참

- 둘이 꼭 붙어있어요
- 아주 절친한 사이던데요

서로 안 붙어있으면
못살 것처럼 말이죠

- 안 그래도 슬쩍 물어봤어요
- 뭘요?

- 약혼한 거 아니냐고요
- 따님은 뭐라시던가요?

- 아니래요
- 그렇군요

- 하지만 하게 되겠죠
- 이만 가보겠습니다

지오바넬리 씨가
얘기해주기로 했어요

남편한테도 편지를 쓰려고요

데이지 양께
작별인사나 전해주시죠

랜돌프를 만나면
당장 집으로 오라고 전해줘요

- 그러죠, 안녕히 계세요
- 잘 가요

- 랜돌프! 유지니오는 어쩌고?
- 날 찾겠죠

윈터본 씨

- 외로워 보이시네요
- 제가요?

- 항상 혼자 다니시니까요
-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군요

- 제가 너무 바쁘다는 건가요?
-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

다들 놀라는 척하는 거예요
실제로는 관심도 없으면서

남들이 얼마나 불쾌하게
생각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

파티에 초대하는 이도 없잖아요
모르시겠어요?

제가 아는 건 당신이
고리타분하단 것 뿐이에요

남들이 느끼는 불쾌감에 비하면
전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

- 남들이 어떤데요?
- 당신을 외면하잖아요

- 무슨 뜻인지 알죠?
- 워커 부인처럼요?

그렇다면 당신이
가만히 있지 않겠죠

- 한 마디 해주시겠죠
- 그래요

- 뭐라고요?
- 그건...

뭐죠?

당신이 약혼한 것 같다고
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

그러실 거예요

- 랜돌프도 그렇게 믿나요?
- 그 앤 아무 생각 없어요

말 나왔으니 얘기하죠
약혼했어요

- 안 믿으시는군요
- 믿습니다

- 받아요
- 고마워요

- 산책하시겠소?
- 됐습니다

당신이 그 말을 믿을 리 없죠
솔직히 말하면 안 했어요

나더러 제네바로 오라더군
애들이 학교에 있다고 말야

저녁식사 내내 말이 없더군

- 무슨 일 있어?
- 글쎄

- 데이지 양을 봤네
- 어디서?

- 도리아 궁에서
- 혼자 있던가?

단추 구멍에 꽃을 나풀거리는
그 이태리 녀석도 함께였지

- 예쁘긴 하더군
- 맞아, 신비롭지

- 뭐?
- 속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

- 순진한 건지 말야?
- 그런 것 같아

자넨 속도 좋구먼

그 이태리 놈과 은밀한 곳으로
항상 몰려다닌다고 들었는데

미국 아가씨라서
그럴 수도 있겠지

여름에 함께
제네바로 가지 않겠나?

그토록 그녀를 그리워했는데
이젠 늦었어

지오바넬리에게 빠졌으니

금방 잊을 걸세

- 난 걷는 게 좋겠네
- 뭐라고?

저녁 공기가 좋잖나
바람 좀 쐬고 싶어

다음 주 오페라에서 보세
기운 내, 멋진 여름이 될 걸세

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노리듯
우리를 쳐다보고 있네요

나부터 먹어치우고
당신은 디저트로 남겨놓겠군

윈터본 씨에요
날 보고도 모른체 하다니

- 여기서 얼마나 있었죠?
- 글쎄요, 저녁 내내요

그렇군요

참 특이한 곳이잖아요

말라리아라도 걸리면
그런 소리 못하겠죠

다들 이러다가 병에 걸렸소
어찌 그리 무모한 겁니까?

- 그런 건 두렵지 않아요
- 난 이 아가씨를 말하는 거요

좀 위험하다고
얘기는 해봤지만...

- 난 아픈 적 없어요
- 하지만 연약한 처녀가...

달빛에 비친 콜로세움을
꼭 한 번 보고 싶었다구요

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

병이라도 걸리면
유지니오가 약을 줄 거예요

- 당장 아가씨를 모셔 드려요
- 그러는 게 좋겠지요

안내인이 있는지 보고 오죠

콜로세움을 보면
정말 황홀한 느낌이 들어요

스키넥터디엔
아직 이런 게 없거든요

왜 그렇게 고리타분하죠?

내가 약혼했다는 말
정말로 믿었나요?

내가 어떻게 믿었건
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소

지금은 그 말을 믿나요?

약혼을 했든 안 했든
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소

서둘러요
자정까지 도착하면 될 거요

약은 챙겨먹도록 해요

열병에 걸리든 말든
상관없잖아요?

끔찍하군요

저녁 내내 그 남자랑
단 둘이 있었다면서요?

-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왔대요
- 그 어머니도 문제예요

- 둘 다 문제죠
- 프레디, 프레디!

- 어디 있었나?
- 바닷가에 갔었어

곧 제네바로 가야 해서
숙모님께 인사나 드리려고

워커 부인도 저쪽에 계시네
갈까?

- 굉장히 아프다고 들었어요
- 병원에 있대요?

아뇨, 어머니가 돌보고 있는데
진찰도 여러 번 받았대요

- 당연한 결과죠
- 찰스!

데이지 양 소식 들었나?

못 들었나 보군

열병에 걸렸다네
상태가 심각하다던데

프레디!
어디 가나? 프레디?

밤새 그러고 다녔대요
그러니 아프지

밤에만 쏘다녔거든요
좋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

여긴 밤이면 깜깜해서
달빛 없인 보이는 게 없잖아요

미국은 안 그렇거든요

내 말이 맞죠?
여긴 너무 어둡잖아요

- 랜돌프, 아직도 안 잤니?
- 잘 거예요

감사합니다

- 밀러 부인
- 오셨군요

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
소식을 들었는데 따님은요?

의사선생님도 잘 모른다네요
데이비스 선생님은 아실 텐데

-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?
- 아뇨, 그냥 열병인걸요

랜돌프는 일찍 자야 하는데
그래도 도움이 돼요

나름대로요

의사선생님께선 열이 높아서
상태가 아주 나쁘다더군요

곧 회복될 겁니다
열이야 오르다가 내리겠죠

데이지가 신사분에 대한
얘기를 했었어요

쓸데 없는 말이 많은 아이지만
그 때는 다르더군요

이 말을 전해 드리랬어요

지오바넬리와 어울려 다녔지만
약혼한 적은 없었다고요

다행이죠, 애가 아픈 뒤로는
찾아온 적도 없답니다

신사인줄 알았는데
이건 예의가 아니죠

데이지와 못 어울리게 했는데
그걸 불편해 한다더군요

내가 아무 말도 않고
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봐요

부인을 과소평가 했군요

어쨌든 약혼하지 않았단 걸
전해달라고 했어요

반드시 전해달라고
세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답니다

스위스의 어느 성에 갔던 걸
기억하느냐고 물어봐 달랬어요

그런 건 전해주기 싫다고 했지만

약혼하지 않았단 사실만으로도
전 기쁘답니다

아멘

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
본 적이 없었소

누구보다 상냥하고...

순진한 아가씨였죠

- 순진했다고요?
- 그래요, 순진했어요

대체 왜 그런 곳으로
데려간 거요?

- 난 두려운 게 없었고, 또...
- 또?

그녀는 감정에 솔직했던 거예요

감정에 솔직했다...

살아있다면
난 빈손으로 돌아섰을 거요

나와는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

-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?
- 나만의 기대일 뿐이었죠

확신해요, 그랬을 거요

그만 가자꾸나

이제야 알겠어요
전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거에요

네가?
어떻게?

죽기 전에 제게
메시지를 전했어요

그 땐 이해하지 못했지만
이젠 확실히 알겠어요

그녀도...
절 존중했을 거예요

결국 그 말은 곧

그 아가씨도 네 사랑에 대한
반응을 보냈을 거란 말이니?

숙모님이 옳았어요
지난 여름에 하신 말씀이요

전 착각한 거예요

너무 오랜 시간을
외국에서 보낸 것 같아요